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번의 난 (문단 편집) == 결과 == '''오삼계'''는 무덤이 파여져 시신이 꺼내진 후 [[부관참시]]를 당했고, 오씨 일가는 전원 멸족되었으며 번은 철번되었다. 특히 강희제는 애당초 번을 존속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다른 번들의 말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평남왕 '''상지신'''이 북경에 압송되어 자살 명령을 받고 자살했다. 그는 반란에 가담한 혐의 외에, 항복 이후에도 황명을 씹고 반란 토벌에 가담하지 않은 죄가 걸려있어서 얄짤없었다. 다만, 아버지 상가희가 죽을 때까지 청조에 충성했으며 반역 자체를 장남 상지신 혼자서 주도한 것, 그리고 상지신이 처음부터 자기 지위의 보전이 목적이라서 전면적으로 반역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바로 항복한 것이 참작되었다. 그래서 상지신에겐 능지형 대신 자살로 형을 낮추는 한편 나머지 가족의 죄는 묻지 않았다. 상가희의 차남 상지효가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북경에 오자 강희제가 직접 맞이하기도 했으며, 상가희에게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치러 주도록 했다. 물론 죄가 오삼계와 동급이던 정남왕 '''경정충'''과 경씨 일족은 애당초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강희제는 경정충과 그 일족을 당연히 처형했다. 경정충은 대역 죄인에 내려지는 [[능지형]]을 받았다. 경씨 일족들 역시 빼도박도 못하는 적극적인 반란 가담 혐의가 걸려 역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로서 강희제는 목표로 한 삼번의 철폐를 큰 희생 끝에 이뤄내고 중국 전토에 대한 직접 지배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정경 사후 내분에 휩싸인 동녕 왕국의 대만 또한 정벌하면서 대청제국은 명말·청초의 대란을 이겨내고 중원을 완전 정복하게 된다. 이 전쟁의 여파로 [[경덕진]]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탓에 도자기 수입이 힘들어진 서양 상인들이 일본으로 눈을 돌려 일본의 요업이 성장한다는 말이 있으나, 낭설이다. 삼번의 난과 관계 없이 경덕진은 청대 내내 융성했다. 쑥대밭이 되어버렸다는 경덕진에 독도관(督陶官)이 파견되어 관요의 자기 생산을 감독하고 다양한 기법들을 실험, 개발하고 있었고 옹정, 건륭 시기까지 경덕진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특히 옹정 시기에는 서양과 중국의 기법을 융화시킨 채색 기법이 개발되어 유럽에 수출까지 했다. 그리하여 중국 도자기는 아편무역이 주류가 될 때까지 차와 함께 청나라의 엄청난 대서방 무역흑자의 일등공신이었다. 또한, 서양 상인들의 도자기 수입처는 경덕진이 아니라 중국 남부에 산재한 무수히 많은 관요와 민요였으며, 이들은 마카오와 광저우에서 이를 구매했다. 북쪽에서는 캬흐타, 네르친스크, 알탄불라크에서 교류가 이뤄졌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은 삼번의 난이 아니라 명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인한 중국 도자기 생산량의 급감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이로서 만주족이 산해관 입관후 약 30년간 반항하던 한족 세력을 모조리 온전히 일소하고 광활한 대륙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청나라와 강희제는 대륙을 확고히 장악하게 되며, 북경에서 중국 남해안까지 이르는 지역에 청나라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게 되었다. 그 장악력을 바탕으로 약 100여년간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전성기, 즉 '''[[강건성세]]'''를 열게 된다. 이 때문에 의미있는 한족의 반란은 100년후인 18세기 말이 되어서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기 전까지 전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